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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되감을 수 없는 추억-1

48일 달 2016. 6. 4. 09:08

"보고싶다"

조그마한 집에는 햇볕이 잘 드는 마당이 있었고 오른쪽 편에는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화단 쪽에 의자를 놓았다. 힘없이 털썩하고 앉은 그녀는 그 한마디를 덩그러니 허공에 던져 놓고는 멍하니 꽃밭만을 바라보고 있다. 벌이 그녀의 머리 위를 위잉- 하고 한바퀴 돌고 지나가도, 산들바람이 살랑거려도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은 공허했다. 그녀의 시선은 꽃이라던지 풍경이라던지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 눈에만 보이는 추억을 회상 중일수도 있다. 회상중인 추억은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닌지 붉은 눈동자가 흐려져 왔다.

"니코."

외롭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물을 황급히 닦았다. 니코가 본 여자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보랏빛 머리를 귀 뒤로 얌전히 양갈래로 묶은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다만 달라진 점은 나이가 먹어감으로 깊어진 주름살이라던지 묘한 분위기 뿐.

"왔구나."
"가자."

검은색의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은 노조미의 손에는 흰 국화꽃 두어 송이가 포장되어 있었다. 니코는 그 꽃을 못본체 하며 노조미의 손을 잡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를 보러간다. 여자가 몰고 온 하얀 차량에 탑승하자 니코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사진이었다. 니코와, 노조미와 그리고

에리.

니코는 차가 움직임에 따라 같이 흔들리는 사진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핸들을 잡은 노조미는 힐끗힐끗 그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어느덧 그 사건과는 10년의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아릿해지는 마음에 노조미는 검지손가락으로 핸들을 두어번 움직였다. 그래, 이렇게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흘렀다. 사진의 잔잔한 흔들림이 10년 전 일을 두드린다.

-

회상하는 10년 전은 에리가 살아있는 때였다. 에리와 노조미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거실 하나, 주방 및 욕실 하나. 단초로운 구성의 집인만큼 그녀 둘 사이의 관계도 단조로운 연인 사이었다. 그나마 연인 관계었기때문에 떨어져 있을 새가 없다며 에리는 좁은 집도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언제든지 집에 억눌릴 거 같다는 위기감이랄까, 좁아터진 집은 노조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노조미, 나 나갔다 올게."
"옷 너무 짧데이."
"안 짧아."

입술을 쭉 내밀자 립스틱을 잔뜩 바른 에리의 입술이 쭈웁-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진다. 밋밋한 그녀의 입술에 에리의 빨간 립스틱이 찐득하니 묻었다. 혀를 내밀어 다시금 입술을 쓸어내리던 노조미가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아무리 봐도 가슴이 훤히 보이는 나시티와 짧은 반바지는 용납할 수가 없다. 억지로 가방 안에 가디건을 넣어주니 에리의 날카로운 눈길이 노조미를 쑤신다. 어쩔 수 없다. 옷은 갈아입지 않을 거면서 이것도 최대한 봐 준거다. 

그녀가 쾅 하고 문을 닫고 나가자 노조미가 쭈우욱 기지개를 편다. 이제 혼자라서 편하다. 노조미는 숨을 끝까지 들이마셨다가 푸- 하고 내쉬었다. 노조미에게 답답하고 갑갑한 집은 에리에게마저 숨기고 싶은 고민들이 있을 때 한숨을 쉬기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런 집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대학생이 되며 노조미의 부모님이 그녀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어버린 데다가 고등학교 때 뮤즈로 큰 인기를 얻은 탓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추근덕거리는 사람이라던지, 일하는 시간이나 강도에 비해 스쿨 아이돌- 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주는 적은 시급들도. 조용한 그녀의 삶에 고등학생의 일은 후회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
사람,
그녀의 삶은 사람에 지쳐가는 인생이었다. 그 결과 사람 사이에 일들은 모조리 지쳐버려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가끔 에리가 가져다주는 부업이라던지 별로 수입이 없는 일을 한다. 이런 노조미의 마음을 에리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노조미가 집에서만 있는데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노조미에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에리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말짱하게 잊은 상태일 것이다. 배고파, 중얼거리며 노조미는 텔레비전의 채널을 뒤적였다.

[자 오랜만의 컴백이죠, 야자와 씨.]

리모콘을 돌리는 손을 멈췄다. 화장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제 오랜 친구가 보인다.

[니코니코니☆ 모두에게 행복을 드리는 야자와 니코입니다. 오랜만이예요,]

고등학생 때의 활발함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이제는 텔레비전 안에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 연락을 했던 날보다 연락을 하지 않았던 날들이 많았다. 그녀는 텔레비전 안에서 웃고 있었고 그 모습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기분을 엿볼 수 있었다. 제 자신은 스피릿츄얼하니 삼년동안 보았던 친구의 기분조차 못 느낄 리가 없다. 최근 근황을 묻는 토크쇼에서 털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분명했다. 토크 중에서도 가족들 얘기가 오가는 것을 보아하니 그 귀여운 아이들도 잘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편한 옷을 입고 쇼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마뜩찮게 보고 있는 노조미와는 다르다. 그래, 달랐다. 제 친구는 저렇게 잘 살고 있는데. 어느순간 굳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노조미는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배고파."

노조미는 누가 들으라는 듯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냉장고를 뒤적였다. 그녀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지만 얼마전에 에리가 사다 놓았던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꺼내들었다. 분명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버리면 에리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질지 눈앞에 어른어른거린다. 그 얼굴이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뭐라도 저질러버리고 싶었다. 단것을 먹거나 쓴 것을 먹거나 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아이스크림 쯤이야.. 또 돈벌어서 사 주지. 노조미는 아이스크림의 껍질을 벗겨 쓰레기통에 넣고는 아이스크림 한 입을 우물우물 베어물었다. 고민에 고민을 한참 한 결정이었지만 노조미에게 단 것은 이런 복잡한 기분을 싹둑 잘라주지 않는다.

"왔어."

예상외로 에리는 빠르게 집으로 왔다. 쑤셔넣었던 가디건을 입은 모습은 노조미가 보기엔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보이지 못했다. 묵직한 서류봉투를 넘겨주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평소처럼 엉겨붙는 게 아니였기에 당황해하며 노조미는 서류봉투를 뜯었다.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얻는 금액은 선불로 지급하겠습니다.]

짧은 문구와 뒷장에 흑백으로 인쇄된 친구의 모습.

백지수표에 적힌 믿을 수 없는 금액과 그 금액에 버금갈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에리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로 온 소음을 차단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이 상황에서 노조미는 아무런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것의 출처를 묻고 싶었고, 내용을 아는지의 여부도 묻고 싶었으나 그냥 입 안에서만 감돌기만 했다. 노조미는 수표를 집어들고 다시금 쳐다보았다. 생각을 하는 건지 노려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연인이기 때문에 스피릿츄얼한 마음으로 알 수 있다.

"갔다온대이."

누워있는 에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서류봉투에 같이 넣어져 있었던 고급스러운 버건디 색상의 선물상자 안에는 소형 권총이 같이 들어 있었다. 노조미는 점퍼를 걸쳐 입으며 속 지퍼 안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묵직한 느낌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갔다온다는 노조미의 말에 에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문을 쾅 닫자 바람소리에 소파에서 서류봉투가 후드드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왔다. 현관문이 세게 닫힌 탓에 몰려오는 바람은 에리의 몸이 가볍게 떨리게 만들었다. 에리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가디건에 가려진 에리의 허리춤에는 짙게 그어진 칼자국이 겨우, 겨우 드러난다


[기다리고 있그래이.]

에리의 핸드폰에 액정이 환하게 비치었다 사라진다. 같이 쓰는 카드에 노조미가 돈을 넣어놓았다. 그 문제의 서류봉투를 들고온 순간부터 노조미와 에리, 둘 다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노조미는 반대의견 없이 일어났다. 이런 일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에리를 믿는다는 의견일 것이다. 하지만 에리에게는 돈도, 무엇도 필요없었다. 나가기 전 한번만이라도 좀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노조미가 다시금 원망스러워졌다. 핸드폰 배경화면엔 노조미와 에리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있건만 그 화면을 손가락으로 세게 눌러 꺼 버렸다. 
에리는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허리의 상처 때문인지 쉽게 일어나기 어려웠다. 어지러운 방에서 약이라도 바르고 붕대라도 찾아 붙이고 싶었으나 허리 부분이라 약이라도 제대로 바를 수 있을지나 몰랐다. 다시금 길게 느껴지는 고통에 눈물이 절로 맺혀왔다. 아파, 아프다고. 이런 순간 노조미는 옆에 없다. 


그 사실을 노조미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선 자신이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마무시한 돈이 들어있는 카드를 다시한 번 꽉 쥐었다. 손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며 방금까지 텔레비전에 보이던 그녀가 있는 곳을 부른다. 노조미의 모습을 힐끗 보던 기사가 엑셀레이터를 황급히 밟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한 손은 가슴에 짚어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니코가 황급히 무대 위를 빠져나온다.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웃으면서 좁은 길을 빠져나가면서 매니저의 잔소리가 폭풍같이 들려온다. 어디서 삑사리가 났으며, 어디 부분에서는 스텝도 엉켰다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재깍재깍 귀에 박힌다. 스텝 꼬였으면 매니저도 분명 제가 걷기 힘들 정도로 아픈 건 알 것이다. 그걸 모른체 하는 것인지 낮은 목소리로 웃으세요, 라고 말하며 니코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발이 아팠다.
무대에서 스텝이 꼬이면서 거의 털썩 주저 앉을 뻔한 걸 어쩌다보니 일어났다. 그래서 무대사고 없이 생방송을 마쳐냈다. 걱정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삐었다. 말 안해도 인터넷 안의 사람들은 니코에 대해 분분한 의견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픔을 신경써 주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지금 당장 옆에 있는 매니저도 잔소리뿐인데. 게다가 힐 때문에 걷는 것도 더 불편했다. 등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잔소리는 더 심해지겠지만 차 안에 타면 앉을 수라도 있다. 저 문만 벗어나면 된다.

"아!"

꼬이고 꼬이던 스텝이 드디어 박살이 난다. 높은 힐과 함께 니코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발바닥과 발목이 욱신거림이 심해졌다. 눈물이 핑 도는데 문 바깥의 팬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매니저의 마뜩찮은 눈길과 어서 일어나라는 목소리도 이제는 커지고 있었다.

"애를 이래 심하게 다루면 쓰나."

누구세요, 하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누그러진다. 공주님 안기로 들여올려진 니코의 몸과 그녀의 흐릿한 시선에 들어오는 건

"내다. 니콧치."

노조미.

가시죠, 낮아진 목소리에 쭈그러진 매니저가 차량으로 인도했고 니코의 옆에는 노조미가 있었다. 여기 방송 쪽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담근 사람들은 어느날 반짝하고 떠오른 뮤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게 니코에게 하나의 백이 되어 주었고, 그 활동이 아니였으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거라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노조미를 몰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움직이는 차 안에 앉아서 대화 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니코가 본 노조미는 그녀가 무슨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더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잘 지냈나."

노조미의 그리운 음성이 귓가에 퍼진다. 힐끗 니코를 본 노조미가 그녀가 입을 떼기 전에 그런 거 같지는 않지만, 하며 매니저를 거울 너머로 쏘아보았다. 뭐 하고 지냈냐는 니코의 어설픈 목소리가 노조미의 화를 가라앉힌다. 저런 매니저보다 내가 매니저인게 더 낫지 않겠어? 라며 니코의 말을 간단히 씹어버리며 노조미가 말한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발목을 주물럭거리는 노조미의 손에는 어떤 감정이 들어가 있는지 니코는 알 수 없었다. 아픈 것보다는 만난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어떻게 만났다한들 소중한 시간인데 그 시간을 이리도 화만 내며 지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허벅지선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이 싫어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제야 엉망이 된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는 왜 우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릎에 니코를 눕히자 진정이 된 듯 끄윽끄윽 울음을 그쳐가는 정숙한 차 안. 노조미는 심란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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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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