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팬픽

[노조에리] 휴가

48일 달 2016. 6. 5. 13:35

"방학이다~ 그치?" 
"그렇구만. 방학 때 닌 뭐 할낀데?" 
"으- 아직은 무계획. 토죠는?" 
"난, 러시아." 

어리둥절한 옆의 여자에게 가벼운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러시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잊혀질래도 잊혀지지 않는 너. 너 때문에 나는 러시아가 굉장히 낯설지만 낯익은 곳이였다. 

"음- 러시아라면 금발의 예쁜 언니들이 많은 곳인가? 저 언니처럼." 

같이 얘기하던 옆의 여자는 길게 손을 뻗었다. 시원시원한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 

긴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한 까만 선글라스보다 그 아래 들어오는 붉고 작은 입술이였다. 도톰하고 붉은 입슬은 푸른 빛깔의 빨대를 앙- 하고 물고 있었다. 가슴이 약간 끼는 듯한 채도가 낮은 청록색의 블라우스. 그리고 하얀색 핫팬츠 아래로 드러나는 하얀 허벅지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급하게 헛 하고 들이쉰 숨은 다시 내뱉어지지 못하고 심장을 더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가슴사이즈를 대충 눈으로 어림짐작해도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쥔 아메리카노가 뜨거운 햇살에 녹아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에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에리치." 

뒤에서 두 번 너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부러 타는 입술을 그녀의 귀에 가까이 댔다. 붉은 귀를 씹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다. 

"노조미." 

정답. 나는 너를 잊어버릴 리가 없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이사하지 않은 집으로 데려갔다. 어두운 집안에 불을 켜자 그녀가 오랫만이네- 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옛날엔 이런 거 잘 안신었는데. 굽이 높은 하이힐에서 내려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뒷모습에 와락 안기고 싶었다. 

손을 뻗자 하얀 손이 내 손에 감겼다. 물방울이 맺혔었던 차갑고 축축한 손이 손바닥과 손등에 얽혔고 목이 말라왔다. 물보다는 네 손가락을 통해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겨우 참자 내 시선은 다른 한 손에 꼬옥 붙잡은 푸른 트렁크가 보었다. 

"왠일인..겨. 에리치." 

"보고싶어서." 

에리치는 보지 않았던 사이 성격적으론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으며, 외적으론 남들도 뒤를 한번씩 돌아볼 정도로 뇌쇄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금발의 긴 머리는 질끈 묶는 대신 폭포처럼 하얀 목덜미 아래를 자유롭게 흘러내려왔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은 따뜻한 파란 눈동자는 그리운 고등학생 때의 향수를 마구마구 불러 일으켰다. 

"보고 싶지 않았어? 노조미-" 
"ㄱ....그체." 

미적지근한 내 말에 에리는 시큰둥하게 일어났다. 주방쪽으로 익숙하게 간 그녀는 마치 제 집인양 이것저것 꺼낸다. 푸르른 녹차통과, 손때가 군데군데 간 돼지모양 주전자. 너와 같이 그릇 가게에 가서 샀던 보라색과 푸른색이 오묘하게 엮인 컵 두개. 

뒤에서 준비하는 네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일어나 그녀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가슴을 당장이고 주무르고 싶었는데 어쩐지 망설이고 있었다. 허리도 눈에 아른거린다. 하얀 빛깔이 나를 어지럽혔다. 

"노조미." 

입술이 가장 먼저 촉촉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버버해 있는 나의 손 대신 허리를 짙게 감싸오는 하얀 손. 항상 바르고 다니던 체리 향의 입술 보호제 맛이 난다. 젖어가는 입술에 어색하게 내렸던 손을 다시 올려 그녀의 목을 감쌌다. 

드디어 만났다. 내가 사랑하는 에리치. 



씻는다며 들어간 에리를 위해 트렁크에서 옷을 꺼냈다. 하나같이 얇은 거, 짧은 거. 햇볕이 한창 따가울 시기라는 걸 너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였다. 이런 거 입고 바깥에 다니면 내가 싫어할 걸 알고 그랬는지. 

수건과 그녀의 핑크빛-을 띄는 수줍은 속옷. 나시티와 짧은 반바지를 꺼내는데 툭, 뭔가도 같이 손에 굴러 떨어진다. 

"여..권?" 

짙은 녹빛에 두툼한 금박의 인쇄된 정갈한 글씨체가 눈에 낯설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빳빳하게 꽂혀 있는 표. 


내일. 

보고싶어서 잠깐 무리하세 짬을 내서 그녀는 나에게 왔다. 평생 내 옆에 있어줄 듯 그런 의미로 말하고 왔으면서. 벌써부터 그녀가 쥐고 있는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에서부터 아련해져왔다.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는 척하지 말아야겠다 싶어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어나서 욕실 문앞에 옷을 가지런히 두고. 

세일차 사 놓았던 맥주 캔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맺혀있던 물방울이 또르르 아래로 굴러내려간다. 그녀를 향한 내 야릇한 감정들이 물방울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예쁜 너를 품에 가득 안고 싶었다. 무릎 위에 올려서 앉히고 부끄러운 볼을 한아름 베어물고 싶었다. 물줄기 소리는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로 멈췄고 문이 삐그덕하고 열렸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닦아내고 젖은 머리칼은 소름. 나는 얼굴이 발개져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 힘들어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노조미. 얼굴 빨개진 거 다 보여." 
"자..잘못 본거여!" 
"와시와시- 안 해?!" 
"어린애같은 장난 이제는 안한다 아이가!!" 

고약한 손장난 말하는 거겠지. 정말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손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 부루퉁해져 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던 좋지 못한 사실을 알고 나니 네가 떠날 때까지 꼭 껴안고 싶은 마음보다는- 
너와 조금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너란 사람은 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모르겠다. 있을 거면 좀 오래 있을 것이지. 입술이 댓발 튀어나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 마음을 밀어넣고 싶지도 않았다. 

나 삐졌어- 에리치. 

왜 삐졌냐고 물으면 아무 일 없어! 라고 말하며 맥주를 건네야겠다. 

나는 그녀에게 쏘아붙이듯 여권 봤다고, 왜이렇게 빨리 가냐고 땡깡부릴 수 없다. 
분명히 그 말을 꺼내면 네 맑은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질 건 눈에 뻔히 보일 것이다. 그러면 또 말 못할 분위기에 공기조차 퍼석해지고. 그런 상태로 널 떠나보내면 난 또 말못할 서러움과 아쉬움에 한참이나 기분이 안 좋아질 것도 뻔하다. 

"어? 맥주?" 
"치사하게 먼저 마시기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가 기분이 토라진 것도 모른다. 같이 마실랬는데!! 술도 잘 마신다. 꿀꺽꿀꺽 마신 다음에 캬- 하는 소리까지. 안 좋은 기분이 더 안 좋아지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차가운 맥주캔 하나를 내 뺨에 대는 그녀에게 푸르르- 풀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가방을 뒤적거린다.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dvd를 빌려왔다면서. 

블론드 빛 머리가 이리저리 찰랑찰랑 움직이니 뒤에서 폭 안고 싶었다. 웅얼거리는 체리빛 입술과 오묘한 턱선. 잘 빠진 몸매가 곱고 고와 나는 초조함에 엄지손톱이 자꾸 입가에 닿았다. 곧 그녀가 dvd를 꺼냈고, 소파에 앉자마자 내 몫의 맥주캔을 탐나는 듯 쳐다봤다. 맘대로 먹어버려, 말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맥주캔을 빼앗아간다. 아저씨 느낌이야. 에리치. 

"노조미." 

영화가 틀어지고 영화관같은 분위기를 위해 불을 끄자 눈이 조금 풀린 그녀가 옆에 바싹 닿는다. 짧은 바지를 입어 하얀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벅지에 닿는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싶었제. 와?" 
"아니."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는 이제는 내 허리를 감싸안아 가슴에 얼굴의 감촉이 닿았다. 

"난 노조미가 보고 싶어서 왔어." 

텔레비전에는 겨우 막 시작한 영화에서는 기차소리가 칙칙폭폭 하고 울려퍼진다. 그보다 내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두근거린다, 아니 쿵쾅거린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너는 이렇게 내 마음을 풀어헤쳐놓는다. 지금 너의 풀어진 눈동자처럼 내 마음도, 이성도 풀어버린다. 

"...내도." 

보고싶었어. 


우리 엄청 오랜만에 만났다. 말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간히 연락할 시간도 없이 회사 일, 학교 일에 바빠 서로에게 소홀했던 시간들이었다. 가끔 연락하면 보고싶다는 말 밖에. 오래 보지 못했는데 좋아한다는 감정이 빛바래버린 게 아닌지 싶어 무서웠다. 그렇기에 좋아한다는 말도 말하기조차 미안했다. 

너를 오래 보려면 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차일피일 미루던 나와 달리 너는 훌쩍 날아와 매 옆에 있었다. -비록 내일 간다지만. 


"나 내일 가." 
"......알아." 
"그래도 보고싶어서 왔어." 

배시시. 그녀가 웃는다. 에리가 웃는다. 부루퉁한 마음은 그녀 앞에서 화를 낼 수 없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어떡해. 

다만- 

"와시와시- 할거야. 나." 
"언제든지." 

좁은 소파에 섹시하게 눈을 반쯤 뜬 그녀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얼굴이 붉어진 내가 누워 있다. 영화는 흘러가고, 너와 나의 추억도 다시금 새긴다. 



"에리치- 비행기 늦는대이!!" 
"이게 다 노조미 때문이야아아아아!" 

헝클어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며 그녀가 소리를 바락 지르고는 따라온다. 

"노조미- 나 너무 더워어!" 

어제는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이었다면, 오늘은 롱 원피스다. 롱 원피스에 가디건까지 꼼꼼히 입혔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니. 누구에게 뺏길까봐 걱정스러워 입혀놨더니 저리 울상이다. 울상이 뭐야. 내 마음인데! 입술을 댓발 내밀려고 하니 그녀의 입술이 자연스레 막아버린다. 

"나 이제 가. 노조미. 잘 있어야 해." 
"..." 
"응?" 

"에리치- 가자." 

응? 어안이 벙벙한 그녀의 손을 잡고 게이트 방향으로 걸어갔다. 

"같이 가재이." 

러시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아직, 헤어지기는 이르잖아 에리치. 그체. 





---

20150906

'팬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조니코]고민을 들어드립니다 下  (0) 2016.06.05
[노조니코]고민을 들어드립니다 上  (0) 2016.06.05
[노조에리]해피 버스데이  (0) 2016.06.05
이웃집 노조미  (0) 2016.06.05
노조미가 초콜렛 주는 티켓  (0) 2016.06.05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