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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랑- 맥주랑.."




나는 무의식적으로 장바구니 안에 맥주만 집어넣고 있었다. 자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감출 길이 없었다. 한적한 마트 안에 카운터 직원이 자신을 향해 눈길을 자꾸 주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맥주 캔을 다섯 개쯤 들고 나니 손에 들리는 묵직함에 억지로 현실로 끌려왔다. 내 머릿속은 그 생각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과포화였다. 알파카 탈, 점 보던 그 장면, 너의 아름다운 모습과 눈빛부터 내가 너에게 소리질렀던 상황, 캄캄히 몰려오는 외로움. 그리고 5년 전 기억들까지. 순서없이 몰려드는 기억들은 죄스러웠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미안...해."




얼핏 중얼거렸다. 네가 들을 리 만무하겠지만. 집까지 걸어가기도 힘이 없었다. 축 늘어진 비닐봉지에서 덜렁거리는 소리가 났고 구두굽을 질질 끌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봉인했다. 괜히 소리질렀다. 와줘서 고맙다고. 옛날 추억을 돌다리 두들기듯 천천히 하나하나 짚으며 그땐 그랬지- 하고 넘길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억지로 걸어가며 맥주캔을 하나 뜯었다. 제정신이 아니였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 에리치-" 
"응. 니코." 
"니코니코-닛! "




빨개진 얼굴에 흐리멍텅한 눈동자. 차가운 식탁에 뺨을 부비적거리며 니코가 웃음을 흘린다. 그녀는 술로 다시 손을 가져다대는 니코를 몇 번이고 제지했지만 막무가내로 술을 집어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탓에 빨리 왔더니 집 문앞에서 자고 있지를 않나. 집안에 데려 놓았더니 변기에 잔뜩 토를 쏟아내지 않나. 이제는 집에 있는 과일주를 맘대로 따더니 벌컥벌컥 마시지를 않나. 배시시 웃는 그녀를 향해 뭐라 하려다가 말았다. 저도 술이나 마셔야지.




"에리-" 
"왜 불러." 
"나 오늘 노조미 만났어."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일본에 있을 리가 없-




"뮤즈-다 내 탓이야아.."




그 말을 직후로 완전히 뻗어버린 그녀는 검고 긴 머리를 응시했다. 저가 모르는 사이 겉모습은 많이 성숙해져 있어서 처음엔 5년 전 알던 그녀가 맞는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아직도 어린애다. 아직도 3학년 벚꽃이 휘날리는 그때의 니코다. 그 찢어질 듯한 마음은 알고 있다. 둘 다 그 일에 대해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시간을 공유했었고 그 자리에서 지켜봤으니까. 니코가 한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는 걸 설핏 알 수 있었다. 결국은 돌아온 모양이였다. 씁쓸해지는 감정이 차오른다. 억지로 삼키듯 컵에 남겨진 과일주를 마셨다.



오늘따라 알코올이 썼다.














"...그만 만져." 
"으아아아아아악!!"




푹신푹신하고 좋아-. 우리집 스탠드가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 촉감인가..









는 정말 어이없는 말이였다.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에 정신을 깨게 하는 소리였다. 조용히 해. 서늘한 말소리와 동시에 손으로 입을 턱 하고 막아버리는 탓에 나는 켁켁, 하고 기침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하얀 탑나시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여자는 저를 쳐다보며 잔뜩 헝클어진 긴 금발을 쓸어넘겼다. 아직도 졸린 눈이다.







"자라"





베개로 다시 머리를 떨어뜨리며 스르르 눈을 감는 그녀를 어리벙벙하게 쳐다보았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자 단정한 공기가 낯선 장소였다. 그리고 나.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에리는 왜 이렇게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서 자고 있는건지,


그리고


왜!



난!




"끄아아아아악!"




나체에 이불만 둘둘 감고 있는건데!








"술을 그렇게 쳐 마시고- 제정신은 아니지. 어?"




나는 미소국을 앞에 두고 장장 30분 넘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맥주를 마시고 무턱대고 전화를 한 곳이 에리였을 줄이야. 중간에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불러내고는 길바닥에 누워서 자는 것까지 발견한- 상황을 들으면서 나는 벌개진 얼굴을 내내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왠 갑자기 술이야. 연락도 안 되던 애가."




쌀밥을 젓가락으로 쓸어넣던 에리가 물어온다. 잠깐 망설였다. 먼저 노조미 얘기를 꺼내지 않는 한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장동료와 일 문제로 싸웠다고 둘러댔다. 나는 연기도 꽤 잘 하는 편이니까. 그녀는 내 표정을 힐끗 보고는 젓가락으로 두부 한 조각을 집어먹었다.





너- 좀 솔직해 지는 게 좋을거야.




지나가는 말투로 그녀는 말했다.












-





"야자와 씨~?" 
"아, 아. 네." 
"보고서가 이게 뭐예요? 매일 남아서 노나 봐? 제대로 다시 해요."






피드백과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 여자들은 오지랖이 넓다. 억지로 웃었지만 표정에서 다 티가 나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그때의 술은 잠깐의 걱정은 덜었지만 두 배로 노조미를 생각나게 했다.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타를 내는 것은 물론, 손에 잡고 있는 볼펜을 자주 떨어뜨렸다. 밥을 먹는데조차 젓가락을 두어 번 떨어뜨려 결국엔 반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팠지만 물에서조차 모래 맛이 나는 듯했다.






[밥이나 한 번 먹을래?]



술을 마시고 난 뒤로 연락을 한 번도 안할 것 같았던 에리에게 문자가 왔다. 시계 역할이던 핸드폰이였는데. 새롭게 온 문자가 낯설었다.



[그래]



약속시간과 장소를 대충 정하고 거울을 봤다. 얼굴에 살이 많이 빠졌다. 볼살도 없고, 지금부터 화장을 빡빡하게 그려봤자 잡티만 대충 가려지는 화장이 될 게 분명했다. 아이라이너를 몇 번이나 손에서 떨어뜨리면서 화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슥슥 그려가는 나를 발견하며, 5년동안 꽤 많이 변했구나. 라는 것도 생각했다. 빗으로 머리도 슥슥 빗었다. 머리를 한 움큼 쥐어 묶으려고 했던 5년 전의 풋풋한 고등학생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어울리지 않는 직장인이 되었다. 거울에 한 번 대어 보았다가 꼴사나운 모습이 비춰 보여 내 모습을 비웃었다.





그래, 세월이 이렇게 만들었다.




어둑한 길을 구두굽 소리나게 걷고 있자니 알파카 탈을 쓰고 엉뚱한 말을 묻던 노조미가 생각났다. 그 때 목소리도 딱 네 목소리였는데. 시간이 흐르고 멀찍히 떨어져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니 하나하나 네 행동들이 겹쳐진다. 멍청하게 폼을 잡던 나. 외롭다고 울었던 그 때.





"그렇게 울적한 표정 짓고 있으면 좀 곤란한데 아가씨."





허세스럽게 각도를 잡고 있는 에리가 멋쩍게 자세를 고친다. 뭐 먹을까-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도시락을 짠- 하고 눈앞으로 올렸다.





"가 보자. 오토노키자카."




벚꽃잎이 다 져버린 커다란 나무는 싸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에 맥주라니. 그래. 이렇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리는 야키니꾸가 맛있으니 먹어보라고 호들갑을 떨며 내 도시락에 몇 점 얹어주었다.




"변한 건 하나두 없네, 그치." 
"응." 
"노조미도 너 기다릴거야."





응?




눈동자에 짙게 어두움이 그려진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해할거야. 친구니까."




아직 변한 건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낮은 목소리는 더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심장은 풍선을 가득 불어 가득 차 있었다가 빵- 하고 터지는 기분이다. 그 남은 조각들은 5년 전 그날의 노조미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가로막은 길을 용서해 줄까. 나는 아직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에리와 헤어지고 난 길 그대로 나는 기억을 더듬거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맘대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수백번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랐다. 고민스러운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졌지만 어느새 너희 집 앞이었다. 그녀의 집 앞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마음은 어색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의 불은 다 꺼져 있었다. 바로 옆 놀이터가 있었다.







그네가 흔들거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너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전혀 감은 잡히지 않고 무거운 마음은 똑같았지만 기분은 좋아졌다. 어두컴컴한 공원에 가로등 두어 개. 그리고 유난히 빛나는 별들. 별자리는 하나도 모르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나는 가득 숨을 들이켰다. 뭐라도 말해야지.








"노조미 미안해!!!"





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눈물이 가득 맺힌다. 자주 울어버리는 성격이 아닌데. 눈을 감자 가득 맺힌 눈물이 대롱대롱거린다.




"미안해!!!"




네가 듣고 있을 지 모르지만 미안해.




"솔직하게 보고싶다고 말 못해서 미안해!!"





실은 무척 보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네가 먼저 생각났고, 또 같이 붙어 있었던 세명이였을 때가 정말로 그리웠다. 아무 걱정 없이 원하는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는 그 때와, 모든 걱정을 말하지 않아도 같이 나누고 모든 기쁨을 함께했던 웃음들이 여전히 귀에 쟁하게 울렸었다. 그 만큼 보고싶었다. 내 성격이 서투른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미안했다.





"네 마음!! 제대로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같이 못 해서 미안해!!"





미안하고 미안해서 난 널 볼수 없어- 그 말만큼은 꺼낼 수 없었다. 목이 메여버렸다. 나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미안. 이게 너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야. 내 진심이야. 집의 불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은 여전히 고고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를 더이상 볼 수가 없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미워하지 않아"





바람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네 마음을 스스로 부정하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어."





오른쪽의 그네가 흔들린다. 천천히. 몽롱한 밤하늘과 나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녹슨 그네가 끼익끼익 거리는 소리만 한적하게 울렸다.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서서히 멎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많이 좋아해. 니코치."





그 말을 끝으로 서로 끼익거리는 그네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적한 놀이터에 우리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있었다.




--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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