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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노조미를 좋아하는 거 같아."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건 비단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제가 더 죄인이지. 그냥 좋은 언니와 동생으로도 남을 수 있었는데. 이 상황을 만든건 제 자신이었다.
"에리에겐..최선이었겠죠..."
"우미야말로,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만... 노력해야죠."
같이 걷는 두 그림자가 길게 어그러졌다. 작은 자갈들이 밟히는 둔탁한 학생구두의 소음과 딱딱 부서지는 하이힐의 소리는 어긋나게 조화하고 있었다.
"좋아했어요."
단단하지만 따뜻한 그 목소리에 에리는 설핏 걸음을 멈췄다. 두고두고 하고 싶었던 말이다. 이렇게 쓸쓸한 상태가 아니라 초콜릿처럼 달달한 분위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기다리고 있는 간질간질한 상태로 고백하고 싶었다. 고개를 다시금 푹 숙이는 그녀에게 더이상 가까이 갈 용기도 없어졌다. 발자국이 멈춘 고요한 공기를 깨고 나는 앞질러 걸어갔다. 구두 소리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
"에리!"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더이상의 교복이 아니라 단정한 정장 차림의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 게 귀여웠다.
"우미네. 잘 잤어?"
"네."
학생 때와는 다르게 옅은 화장도 하고 머리도 풀었다. 그녀는 졸업 후에 러시아로 돌아간 게 아니라 오토노키자카에서 행정 업무를 보고 있었다. 봄이 되고 3학년은 졸업을 하고 추억속으로 남겨졌지만 그녀만 혼자 남아 다시 작년 봄을 그려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빈 교실에 두 명이 덩그러니 남아 과제도 도와주곤 했다.
"오랜만에 과제도 없는데 파르페 먹으러 갈래요?"
"파르페?"
단 거에 눈이 반짝 뜨이고 말야. 절로 입술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꾸욱 누르며 그녀의 팔에 꾹 기댔다.
과제가 너무 어려워서, 뭐 먹으러 가고 싶어서, 인생이 너무 고달파서 달달한 걸로 고민을 녹여버리고 싶어서.. 등등.
나는 각종 이유로 이렇게 매일 에리를 내 옆에 붙잡아 두었다. 물론 말하고 있지 않은 속마음은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해서.
"그리고 저 머리핀도 하나 살까 하는데 에리가 골라줄래요?"
"헤?"
눈빛이 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응응, 그거 하나는 내가 엄청 잘 고르지! 하면서 열의를 다지는 그녀가 보기 예뻤다.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몰려온다. 이런 등굣길은 좋다. 이 설레는 20분간의 등굣길이 너무나도 기대되고 좋아서 밤에는 베게를 껴안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아침에는 그 시간이 정말정말 설레고 어쩔 줄 몰라서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고 어수선해했다. 그래, 이런 걸 바랐다.
"우미- 너무 붙었어어."
"어때요~"
나는 좀 더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올라오고 나는 충전된다. 하굣길을 기다리는 내가 어쩐지 바보같아져 웃었다. 이제는 이렇게 웃어도 먼저 말 걸어줄 사람이 없다. 코토리는 유학, 결국 호노카는 자퇴를 끝으로 가업을 잇는다. 왁자지껄한 추억에서 벗어나 책을 덮었다. 이제 내 머릿속은 산들산들한 금발로 가득 찬다. 어서 보고싶었다. 어리광부릴 수 있는 에리에게로.
"에리, 이건 어때 보여요?"
"엣! 이것도 이쁘다아~ 저건 어때?"
파란 큐빅이 물결치는 모양을 낸 엄지손가락 크기의 핀을 고른 에리가 제 귀에 걸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온기가 귀 끝에 닿는다. 귀부터 순식간에 빨개져 올 것 같다. 둔한 그녀만 모르겠지, 지금 나는 엄청 긴장중이다.
"예뻐! 진짜!!"
거울속에 나는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왼쪽 귀 위에 꽂힌 핀이 반짝반짝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볼 정신이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에리 뿐이었으니까.
"조, 좋아요. 에리, 이거 지, 진짜 이, 이뻐요!"
최고라는 뜻을 뭐라고 하더라, 엄지. 맞다 엄지를 척!
하자마자 에리가 꺄르륵 웃는다. 엄지 척이 뭐냐면서 웃는 그녀에게 할말을 잃었다. 아, 그냥 평범하게 예쁘다고 말할걸 그랬나보다. 얼굴이 더더욱 빨개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자~ 고개 들고. 어깨도 펴고!"
에리의 하얀 손가락이 제 턱에 닿는다. 그리고 마주치는 하늘색 눈동자. 움츠러든 어깨도 그녀의 손에 의해 쭉 펴진다. 언제 들었는지 왼쪽 귀 위쪽이 허전하다.
"우미한테 잘 어울리니까 이건 내가 살게."
싱긋 웃으며 계산대로 향하는 에리의 팔랑거리는 금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름다웠다. 마주친 하늘색 눈동자가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었을 때 더더욱 마음 속에서 욕심이 생겨났다. 나만 보고 웃어줬으면 하는 그런 독점욕. 다른 건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에리- 저만 봤으면 좋겠어요. 생긋 웃으면서 그 말을 목 끝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아직은 이르다.
파르페를 사이에 놓고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딱 한군데 남은 창가 자리를 나이스 캐치. 같이 쇼핑도 하고 데이트다 데이트.
"이러니까~ 다들 보고싶다."
"그...렇죠?"
파르페 얘기로, 아까 산 악세사리 얘기로 실컷 떠들던 에리가 잠잠해진다. 그녀의 삼삼한 눈빛이 하늘을 한 번 훑었다. 동조해 주긴 했지만 나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같은 심정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그녀를 뺏길까 노심초사해하면서 불안불안해 할 것이다. 오로지 나만 보는 그 시선도 뺏기고 싶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그녀에게.
"아, 에리"
묻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에리의 입술 옆을 가리켰다. 닦으려고 손을 들어올리는 것도 귀엽다. 손수건이나 휴지라도 가지고 닦을 것이지 칠칠맞은 것도 귀엽다. 하- 못찾네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요."
입술을 스쳐 지나가며 뺨에 제 입술을 대었다. 심장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의연하게 다시 제자리에 앉았더니 어버버한 에리가 보인다. 심장에, 심장에 이롭지 않다. 에리의 심장에도 내가 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만 보면 가슴떨리며 안절부절해하며 나에게 기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버버하는 그녀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에리의 볼에 손을 가져다 올렸다. 그리고
꾸-욱
"아얏!"
"귀여워요. 에리."
내 얼굴도, 에리의 얼굴도 빨개진다. 파르페 쪽으로 손을 허겁지겁 갖다대었다. 맛있네요, 나답지않게 우걱우걱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 둘 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잘가요."
어색한 인사까지 마치고 그녀와 나는 돌아섰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신사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노조미..."
이끌리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제는 노조미가 일하지 않는 곳이다. 여기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질투가 났다. 에리가 생각하는 사람은 노조미임에 분명했다. 아까 카페 일만 해도-. 그 순간 나는 그 사이에 끼어드는 하나의 먼지같아 보였다.
"제발-"
추억속에서 바래져가는 하나의 사람이기를.
"그래 간절한 게 있나?"
헉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보라색 머리를 풀어서 웨이브진 머리가 눈에 가장 뛰는 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아, 나는 작게 소리를 내었다.
"오랜만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잘 지냈나?"
"네에...뭐. 다들 얼굴 본 지는 꽤 됐지만요."
"글체..아무래도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우리는 어색했다.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지만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은 대답을 미적거리고 있었다.
"에리는..?"
"..."
"...잘 지내나"
이제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고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침묵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웅. 고마워. 일어나자."
".. 네."
"밥 먹을래?"
"아니예요."
밥 먹으면 체할 거 같아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주워담았다.
"우미."
"네."
"나는 에리를 좋아해."
나는 그 말에 숨을 살짝 멈췄다.
"그것뿐이야."
그녀는 그대로 떠났다. 나는 노조미를 잡지 못했다.
-
만약 그 때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레 붙잡고 에리를 좋아하는 건 나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에리에게 조금 더 빨리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 미래는 바뀌었을까.
그런 걸 생각하기엔 시간은 이미 너무 많이 지났다. 걷던 걸음을 멈출 수 없고 나는 조금 더 빨리 걸었다.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다급해진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에리와 나의 관계도 간지러운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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