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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에리우미]벽

48일 달 2016. 6. 5. 13:42

붙었다 떨어지는 그녀의 입술을 조용히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커피잔을 달그락거리는 모습에 감히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나는 불안하게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입으로 가져간 커피는 어느새 차가워져 쓴 맛만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만하자."

나는 그 말을 곱씹어 소화하고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녀가 지루해 할 정도로.

"..."
"그동안 고마웠어."

그녀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카페를 나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있었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창문 안쪽으로 내리쬐는 늦겨울의 햇볕은 따스했고, 나는 커피와 함께 나른해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거."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전해준 것은 금색의 링.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꿈에서 억지로 깨 버린 것처럼 기분이 싸해왔다. 

"에리."
"..."
"자, 잠깐만요!"

그녀를 뒤따라 나갔지만 계산을 하라는 아르바이트 생의 손길에 이끌려 잠시 멈칫했다. 대충 몇천엔의 지폐를 던지듯 주고 나왔지만 그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구두가 자꾸 벗겨지려는 듯 헐떡거려서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뛰었다. 근처 카페, 뒷골목, 공원까지.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나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첫사랑은 나를 뻥-하니 차 버렸다.



나갔다 돌아온 내 표정을 본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는 모른 척 웃었다. 웃는 척 했다. 내 꼴이 어떤지 어머니는 보았을 것이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인 채로, 얼굴은 잔뜩 울상인 채로 기어이 웃는 내 모습이 꼴사나왔을 것이다. 변명 아닌 변명같은 표정에 어머니는 입을 꾸욱 닫았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던져버린 스마트폰 안에는 계속 그녀에게 걸었던 전화만 수십 통. 저녁도 생각이 없어 거르게 됐다. 다만 가슴 한 쪽이 아릿해 온 몸이 떨려왔다. 던져진 스마트폰에서도 진동은 없었다. 

"추워"

말을 꺼내고 나니 추위는 더욱 밀려왔다. 침대에 앉아 이불을 꼭꼭 덮고 있었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그녀가 없는 빈 자리는 추웠다. 추워서 그런지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목이 따가워 기침을 하는 중에도 몰려오는 울음을 참기 힘들었다. 방을 엉금엉금 기어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전원이 꺼져있어..]

이제는 전화도 꺼 놓았다. 전화가 왔던 내역들은 봤던 걸까 하는 희망에 나는 핸드폰을 감싸쥐었다. 문자라도 써야겠다 싶었다. 

[에리, 우미예요.
거짓말.. 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보내주고 싶지 않아요. 옆에 있어줘요. 돌아와요.
사랑해요.]

썼다 지웠다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똑같았다. 돌아와요. 사랑해요. 보내고 나서도 쉽게 핸드폰을 놓지 못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똑같이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전화기를 끄고 무엇을 할 지 참 궁금했다. 그녀의 집에는 불이 켜져 있을까. 누구와 함께 있을까. 걱정하는 나와 달리 푹 자고 있을까. 스토커처럼 그녀의 행적들이 궁금해졌다.


보고싶다. 보고싶었다.

그 마음이 저 깊은 끝에서 시작되서 목끝까지 차오른 지금, 나는 이불 바깥을 벗어났다. 잠옷 위에 대충 가디건만 둘러입고 나왔다.

[에리, 자요?]
[보고싶어서 나왔어요.]
[나와줄래요? 집 앞이예요.]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기가 켜졌다. 똑같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분명했지만 전화기는 켜져 있을 것이다. 내 문자도 보았을 것이다. 나와 줄 것이다. 나와 줄 것이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를까 몇 번이고 고민했지만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앉아있자니 내 꼴이 우스웠다. 급하게 나오느라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직 날씨는 쌀쌀해 발가락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마음의 고통보다는 이게 백배는 더 나았다.

"..."
-철컥

"돌아가."

문 안쪽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이라도 보여주지. 그녀는 얼굴도, 금발도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문에 딱 기댔다.

"돌아와줘.. 잘못했어요.. 에리."
"찾아오지 마."

나는 다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냉랭해 잠시 멈칫했다. 다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나는 기억 속에 더듬거렸던 티켓을 하나 찾아내었다.

"에, 에리! 기..기억나요? 우리... 영화 보러 가기로 했던거.."
"취소해."
"좋아했던 거..잖아요. 같이 보러가기로 약속했잖아요.. 취소해버리긴 너무 늦었잖아요.."
"취소해."
"취소, 취소 못해요. 가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긴 한숨이 들려왔다. 

"취소해."
"기다릴게요. 금요일 밤 10시 30분이요. 영화관 앞에서 기다릴게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마지막!"

나는 쌀쌀한 그 말 한 마디에 위로받았다.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은 채였지만 슬리퍼를 터덜터덜 끌며 돌아올 수 있었다. 일방적인 약속이였지만 행복했다. 근데, 근데 왜 자꾸 아릿해지는 건지. 왜 자꾸 냉랭한 모습들에 자잘한 상처로 돌아오는 건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찾아오지 말라는 그 말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쓸쓸하게 걷던 내가 나도 모르게 향한 곳은 학교였다. 학교에서 바로 나오면 보이는 동그란 벤치는 여러가지 추억이 깃들여져 있는 곳이었다. 새벽에 학교에 있었던 적은... 고등학생 때 전체 합숙 때 이외에는 없었다. 고등학생 때 멤버들과 수시로 모여서 이러저러한 사소한 얘기들을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며


["좋아해요, 에리."
"내가 우미 더 사랑하는데-"]

아련한 목소리가 추억 속에서 울린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겨우 부여잡으며 고백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교복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너덜너덜하게 잠옷에 슬리퍼 차림이긴 하다. 그 자리에 다시 앉으니 그 때의 기억들이 다시 차곡차곡 피부에 와 닿았다. 처음 쭈뼛대며 고백했을 때부터 그녀와 있었던 많은 일들.

"우-미. 나한테 기대도 좋아."
"나는 밤하늘이고 에리는 빛나는 달님이니까 달님이 밤하늘에 기대어 쉬어요."

그녀는 나에게 빛나는 달빛이였는데. 나는 공허했다. 달빛이 없어진 밤하늘은 더이상 밤하늘이 아니라 차가운 공허일 뿐이다..


-


금요일 저녁.

영화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금발은 도저히 나타나지 않았다. 표를 검수하는 아르바이트 생이 두 장인 표와 한 명인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영화는 이제 곧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미안해.'

나는 옆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뉴욕의 복잡한 어느 거리. 그리고 복잡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보는 남과 녀. 그녀가 보고싶다고 했던 멜로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진짜 보고싶었다면서 호들갑을 떨 때 나는 떨떠름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멜로영화는 쥐약인 나와, 멜로영화에 이입해 눈물을 잔뜩 흘리는 그녀. 그녀 손에 이끌려 갔을 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저 파렴치한 내용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때도 너를 사랑할게.'

여주인공의 말에 나는 눈물이 뚝,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를 잡을 것이다. 잡고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이와 똑같은 상황 앞에 놓인다 해도 나는 이렇게 허약하게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미안했다.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놓여진 다리 위에서 나는 손가락에 곱게 끼워놓은 얇은 반지를 빼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내 손가락에 고스란히 끼워져 있던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

던질까 말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가 다시 끌어안았다. 그녀가 없다면 나 혼자라도 끌어안고 되새기며 살아가면 되겠지.



이별이라는 벽을 아무리 노력해도 부술 수 없어 지쳐버린 나는 그 벽에 기대었다.
사랑했다, 사랑한다.
전할 수 없는 한마디를 추억 속에 책갈피처럼 끼워넣는다. 이제는 안녕, 사랑하는 에리.



--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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