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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감을 수 없는 추억-3[完]

48일 달 2016. 6. 28. 21:34

"나랑, 평생 있어줘"

그녀가 데려간 곳은 예쁜 서양식 별장이 아득해 보일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정원이었다. 6월의 뜨거워지는 햇빛을 닮은 탐스러운 장미들이 각기 제 매력을 뽐내고 있는 정원의 한가운데였다. 니코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그녀가 내민 것은 붉은 장미꽃이었다. 단조롭다고 생각이 들 수 있는 빨간색이었으나 자세히 쳐다보고 있으면 꽃잎 하나하나에 맺힌 물방울과 그 물방울 사이로 작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고백, 장미꽃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니코는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해."
"싫어."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 니코는 뒤로 돌아섰지만 손목이 붙잡혔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다시 말해."

싫어. 니코는 우악스레 손목을 붙잡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센 악력과는 반대로 그녀의 마음은 유리보다도 더 약했다.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 것도, 눈물이 가득 맺히며 뚝뚝 흘러내리는 장면도 니코의 눈에 아프게 비쳤다. 미안해. 니코는 그녀를 받아줄 수 없었다. 넓은 정원을 빠져나가면서 니코는 억지로 참고 있었던 눈물을 닦아내었다. 며칠 전 겨우 계약한 계약서가 가방 안에 고이 접혀져 있었다. 겨우 계약했던 아이돌 계약서였다.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스로 계약서를 찢는 행위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애라는 틀에 갇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싫다. 그렇기에 니코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은 어긋나 보이는 서로의 길이더라도 걷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마주치겠지. 니코는 그런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



화려한 무늬의 꽃병에 꽂힌 검붉은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때의 기억과 함께한 그 꽃이었다. 손수 준비했던 마음을 부서뜨린 니코가 생각난다. 싫다고, 싫다고 말하는 그 입술을 비틀어버릴 수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장미를 다시 훑어내린다.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것은 조각조각 바스러진 검붉은 조각. 하얀 손가락은 제 머리카락을 한 번 꼬아 훑는 것 같더니 머리를 동글게 말아 올렸다. 책상 위에 놓인 장미로 만든 비녀삔을 꽂아 고정시킨다. 비녀의 끝은 다른 것보다도 날카로웠다. 그 때문에 손가락이 조금 베여 피가 뚝, 하고 떨어진다. 혀로 손가락을 쓸어핥으며 거울의 그녀를 살펴보았다. 
결 좋은 붉은 머리, 그리고 위에 올라간 빨간 장미가 탐스러웠다.



-



"오랜만이다?"

먼저 퇴근한다고 니코에게 메시지를 넣어놓았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다가 지갑을 두고 온 걸 깨닫고 다시 대기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거울 속에 차가운 눈동자가 노조미를 주시하고 있었다. 원래 같으면 휴대폰이 터져나가라 서로 연락하는 타입이었지만, 며칠 동안 그렇지 않았다. 차가워진 핸드폰만큼이나 에리의 눈빛도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배꼽이 보이는 짧은 티에 짧은 바지. 가디건은 또 그녀가 챙겨주지 않으면 입지를 않는다. 노조미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노조미가 잔소리부터 먼저 하려고 했지만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을뿐더러 이번에는 에리가 빨랐다. 

"내 놔."

거울 속의 에리가 일어난다. 딱딱거리는 힐의 소리와 그녀의 앞에 서서 당당히 손을 벌리며 요구해온다. 양심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해져버린 그것-총- 을 요구하는 에리였다. 굳어지다 못해 창백한 얼굴인 에리는 어딘가 결심이 확고해 보였다. 평소와 달라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노조미는 고개를 저었다. 총은 에리에게 건네줄 수 없었다. 무대를 보며 확실해진 노조미의 마음을, 에리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리. 다시, 생각해보재이."
"싫어."

파란 눈동자는 정확히 노조미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의 화면을 몇 번 넘기더니 에리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노조미와 니코가 같이 찍힌 사진. 다정해 보이는 그 사진은 아까 있었던 일 그대로다. 에리가 겪었을 기분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전해져왔다. 그래서 그 복수심에 친구를 홧김에 죽이겠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 흥분된 상태에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조미는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싫다.

"질투나. 노조미."
"옛날..친구잖아, 에리."

옛날? 에리가 코웃음을 쳤다. 옛날 얘기를 꺼내는 노조미가 마뜩잖았다. 사람에 지쳐간다고 그녀가 울던 노조미를 위로해 주던 건 에리 저 하나뿐이었다. 스쿨 아이돌 이후 목표가 없던 에리에게 일본을 떠나고 싶다는 목표를 만들게 해 준 노조미, 자신의 옆을 평생 지켜줄 사람도 노조미-라고 생각했었다. 옛날이야기라고 할 것은 에리와 노조미, 둘만의 이야기뿐이었다. 뮤즈 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 자체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에리가 아는 노조미는 에리만 바라보는 꽃 같은 존재였다. 자신만 바라보는 그런 노조미 때문에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데. 노조미의 한 마디에 믿음들이 버석버석 깨진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대기실에 울리는 비명, 그리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쓰러진 노조미의 몸 안에서 그녀가 지니고 있었던 소형 권총이 튀어나왔다. 

"그 대답은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야."
"..."
"난 니코를 죽일 거고, 너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거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문 뒤에서 들리는 말에 니코는 소리를 지르려는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 침착해, 침착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먼저 간다는 노조미의 메시지를 보고 어떻게 좀 더 서두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서둘렀던 게 이런 일을 마주하고 있을 줄이야. 상황은 전혀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제 친구인 에리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녀가 조근조곤 말했던 그 모든 말들도 사실일 것이다. 처음부터 스타일리스트로 왔다는 노조미의 말부터 불안하게 전해오던 위화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신뢰를 주고받은 옛 친구가 처음부터 등에 칼을 가지고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생각하니 현기증이 몰려오는 니코였다. 

"하, 이게 누구신지."

두근두근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이 터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니코의 검은 머리칼을 훑어내리는 손가락. 비아냥거리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 잊을 수 없는 체향까지. 니코가 아는 사람이 맞는다면 그 사람이다. 

"...마키."

기억하고 있구나. 자상하게 그러나 냉랭한 목소리로. 오랜만에 본 마키는 웃고 있었다. 니코는 그것이 억지로 웃는 웃음이라는 걸 한순간에 눈치챌 수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지,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녀가 문을 한 손은 니코의 머리 위에 두고, 한 손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휑하게 불고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연다. 



쾅-

노조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갑자기 문을 연 상대가 몇 년 동안 소식하나 내비치지 않았던 마키였고, 또 울먹이며 들어온 니코가 황급히 바닥의 총을 찾아들고 저를 감싼다. 마키는 한 손으로 에리의 윗옷을 쥐어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쪽으로 데려간다. 두 명 대 두 명으로 대치된 상황, 그리고 총은 니코가 가지고 있었다. 에리가 힘없이 끌리며 그녀의 허리에 그여진 빨간 상처도 그제야 노조미의 눈에 들어온다. 노조미는 모든 것이 벙벙했다. 이 상황을 전부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여기 있는 네 사람 중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침묵적인 상황에서 마키가 가장 먼저 입을 떼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해 줄게. 지금부터." 

꿈꾸듯 살짝 풀린 얼굴을 한 마키의 얇은 손이 에리의 목을 훑었다. 다른 한 손은 도망가지 못하게 에리의 얇은 팔목을 꽉 조이고 있었다. 에리는 심할 정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 답지 않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 보였다. 노조미는 갈수록 불안해졌다. 노조미는 기어서라도 에리를 붙잡고 싶었다. 

"너네가 졸업할 때, 니코에게 고백했어. 평생 내 옆에 있어달라고."

긴장한 니코의 눈빛이 보였다. 총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노조미는 궁금하지 않았다. 에리, 에리가 울고 있었다. 니코는 뒤로 물러서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직도 얼얼한 뺨이었지만 공포감에 고통조차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노조미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마키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를 무시하고 아이돌이라- 인정할게 뭐. 니코가 하고 싶었던 거니까."
"..."
"내 것이 아닌 니코는 필요 없는데.

죽어. 그녀의 하얀 손가락 중에서 엄지와 검지만을 펴 총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마키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는 시늉을 했다. 약간 초연한 표정으로, 눈을 약간 내리까고 입술은 자연스레 벌린 모습. 그리고 

빵-! 


입모양은 실제로 큰 소리를 내었다. 그것이 마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울리는 총성. 니코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마키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세 사람의 시선이 벽에 박혀버린 총알을 향해 스치고, 니코에게 머무른다. 꽤 큰 소리가 났으니 방송 관계자들이 달려올 것이다. 니코는 꽤 장하게도 총을 손에서 놓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마키를 향해 정조준.

"그리고 노조미."

시선이 돌아간다. 겁먹은 노조미의 얼굴이 니코와 마키의 시선에 꼽혔지만, 정작 노조미의 시선은 에리에게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만이 가득 찬 눈빛이었다. 이제 에리의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노조미는 가고자 했으나 니코가 자꾸 막는다. 저기는 위험해 라고 하면서. 다치고 싶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기에 에리가 노조미 없이 떨고 있다. 아까의 상처도 눈에 띄게 생각난다. 어쩌다가 다친 건지, 왜 에리가 노조미에게 한 마디 말도 못 해줬는지.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들었으려나 몰라. 니코를 죽여달라는 서류봉투 안 내용, 내가 준거야." 
"...!"
"처음 듣는 거 같아 보이네. 그럼 이것도 알아?"

실패하면 에리를 죽일 거라는 것도.

"에리 놔, 마키. 안 그럼, 쏠 거야.
"나보다 에리인가봐? 니코 나 잊었구나. 하하."

하하, 그녀가 웃는다. 하하- 발음 하나하나가 정확한 마키의 웃음은 진심으로 웃는 것도 무엇도 아니었다. 
하얀 손이 에리의 목을 감싼다. 머리카락을 올린 장미 모양의 비녀를 뺀다. 비녀의 끝은 날카로웠고, 힘줄이 보일 정도로 비녀를 세게 쥔 마키는 노조미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나와 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기 싫다면 

총을 빼앗아 니코를 쏘라고.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그녀의 눈빛이 말한다.


"멈춰!!"

니코의 외침, 그리고 다시 한 번 공기 중에 닿는 총성. 

비명.

소음.





-




[아야세 에리 양의 살인범으로 지목된 야자와 니코 씨는 징역 10년의 형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아이돌 활동을 접은 지 십 년. 딱 십 년이었다. 차가 크게 덜컹거리자 사진도 크게 흔들리며 니코의 정신도 제대로 돌아왔다. 그 이후 마키는 니코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소식을 전해오지도 않았다. 단지 노조미만이 와서 빈 침묵을 같이 채워주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작은방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에 여러 생각을 하며 빼곡하게 노트를 채울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마키의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때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그냥 차라리 총을 집어던졌으면 에리와 마키 둘 다 지킬 수 있었을지.

"노조미."
"응?"
"미안해."

노조미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은 지독했다. 니코도 마찬가지였지만 세상의 전부인 에리를 잃어버린 기분은 참담했다. 그것은 십 년이 지나도 똑같이 마음이 아팠다. 핸들을 꺾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노조미의 기억 속에 에리가 나타난다. 에리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차가운 바닥에 몸이 내려앉는 그 순간, 그 처참한 장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괜찮냐는 안부를 묻지 않는 현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에리. 

"보고싶어."

에리가 보고 싶었다.




===

감사합니다. 짧지만 저는 굉장히 쓰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쓰면서 자꾸 흑염룡이 나오는...! ㅋㅋ오글거리는 글이 되는 것 같아;ㅅ; 쓰기가 더 두려웠던 것도 있었어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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