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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찾아서 - 8

48일 달 2016. 12. 15. 00:27
마음을 찾아서 - 8

 



하고싶은 대로.
 
 



"카요짱."
"울지 말고."
 
하나요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린의 눈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 주었다. 하나요의 말대로 훌쩍거리는 걸 멈추면서도 눈물은 줄줄 흘렀다. 마치 불가항력인 거 마냥. 린은 속상했다. 마키에게 그렇게 소리지른 제 자신도, 그렇게 소리지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산 제 자신에게. 아무것도 모른 채 린의 상처들을 고스란히 떠안아 버린 마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기억들은 상처가 되어 다시 린에게 남았다.
 
"돌아가서... 사과해야.. 할까."
"그냥 가자. 거의 다 왔기도 하고."
 
하나요의 말대로 그녀의 집은 거의 근처였다. 따뜻해 보이는 연노란색 벽돌이 눈에 띄는 곳이였다. 집은 깔끔한 편이였다. 편히 들어오라는 하나요의 말에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아기자기한 식탁도 있고, 코타츠에 귤과 노트북도 같이 놓아두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방 분위기도 아늑해서 린은 조금 쉽게 마음을 풀 수 있었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며 라벤더 차를 끓이는 하나요의 손은 분주했다. 식탁 한편에 켠켠이 놓여진 종이 한 다발이 보였다.
 
"앗, 안돼.. 린짱."
 
라벤더 차를 들고오던 하나요가 황급히 린을 막으려고 했지만 린은 순순히 종이 다발을 건네주었다. 슬픈 눈빛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요는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드디어, 알아버렸다는 것을.

"만나서 영광이예요. 하나 상."
"린짱..."

목소리 톤이 다분히 낮아진 린이 가방안에 있는 잡지를 꺼냈다. 바로 지난 호. 여행가기 전에 썼던 화였다.

"가방 안에 맨날 들고 다닐 정도로 좋아해요. 이렇게 절절하고 부드러운 연애물을 쓰는 작가님이.."
"..."
"카요...짱이였구나."

린, 하나요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린은 고개를 영 들지 못했다. 아까 전, 스쳐 지나가던 기억이 머무는 곳에 린의 생각이 닿는다. 좋아한다는 말.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그 말은 분명 저 여자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결국엔 린 자신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닭살이 금방이라도 올라올 듯 린은 긴장하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답답했는데-"
"..."
"나, 그렇게 보여?"

대답 대신 하나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닫아둔 방문 안에서 노트 한 권을 들고 나왔다. 대답이라고 주는 노트는 꽤 손을 타 있었다. 그 속에 적힌 글은 연필로 썼다가 지우개로 지운 흔적도 있고 너저분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노래의 의미를 깨달음 여자 주인공은 크나큰 감정의 혼란에 빠진다. 혼란 속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설상가상으로 감기에 걸린다. 열병에 끙끙 앓는 그녀에게 남자 주인공이 찾아온다. 열을 짚어주면서 죽을 끓여주는 남자 주인공도, 여자 주인공도 감정을 모르는 척 한다. 여자 주인공은 이런 감정의 혼란을 들키기 싫어 남자 주인공이 오자 자는 척을 한다. 죽을 옆에 놓아주도, 그녀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한 번,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이 한 번. 여자 주인공이 눈을 팍 뜬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 그녀에게 남자 주인공은 조용히 말한다.

"좋아한다고 같이 부른 우리 노래. 나는 너에 대한 감정을 담았어."
"..."
"네가 칭찬해줬잖아. 감정이 가득 차서 흘러넘칠 거 같다고."
"...아.."
"이제는 들어줘. 내 진심."]

이 글은 척 봐도 다음 원고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지는 메세지였다.

"이제는 알아줘. 내 진심."
"..."
"좋아해, 린."

린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하나요가 고백한 순간 언뜻하니 떠오른 마키가 있었다. 미국에서 체코로 가기 전, 흘려들었던 그녀의 말. 하나요에 대해 대뜸 묻더니 자신은 어떻냐는 말. 농담이 아닐 것이다. 왜 뜬금없이 마키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쉽게 떠오른 마키는 기억 속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응, 린은 머릿속에서 마키를 지우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요의 표정은 점차 밝아졌지만 린의 표정은 반대로 어두워졌다.




-



"알지, 린. 비밀번호는?"
"린 생일이다냐!"

린이 하나요의 집에서 머문 지는 어느덧 일주일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나요는 고백 이후 린을 배려해주려는 듯 좋아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흔히 손을 잡는다던가 어깨를 토닥거린다던가 하는 스킨쉽조차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린이 가질 부담감 때문인지. 하나요는 덤덤했다. 실은 겉으로만 덤덤한 척이었다. 속으로는 아침부터 헝클어진 모습으로 일어난 린을 마구마구 안고 싶었고. 소중하게 쓰다듬고 뽀뽀하고. 좋아한다고 귀에 박힐 정도로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그 마음은 잠시 접는다.

일주일 째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리 곱게 접는다. 출근길, 빵을 오물오물하며 현관 앞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매는 린을 하나요는 매일같이 마주하고 있었다. 아 맞아, 오늘은 잊지말고 해야 할 말이 있다.

"맨날 집 현관에 앉아서 문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 마."
"에..열어주는 게 좋다냐."

린은 항상 하나요가 문이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달라고 초인종을 누르거나 두드리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서늘한 겨울바람에 걱정되서 나온 하나요가 오들오들 떠는 린을 발견하고 집에 데려온 것은 거의 매일같은 일과였다. 집앞에 나와서 기다리겠다고 늘 약속했던 하나요이지만 번번히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마감에 푹 빠져 있어서 시간을 줄곧 체크를 못하거나, 알람이 울려도 왠일인지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오늘은 .. 꼭 기다릴거야..."
"린은 이런 하나요도 귀엽다냐! 그럼! 출근하겠다냐~!"

다녀오겠습니다, 활기찬 인사를 하며 지하철 역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린은 뛰었다. 숨이 차 왔지만, 뛰는 편이 더 좋았다. 린은 하나요와의 기류가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배려해주는 것 조차도 독이 되어서 자신을 졸라올 줄은 몰랐다. 하나요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힘들어. 힘들어. 이 말을 내뱉는 것이 하나요 앞에서는 너무 힘들다.




-


"니시키노 입니다."
"너네 집에 들려서 린 짐 챙겨가려고 하는데."
"..결국."
"언제 시간돼?"
"당분간 야근이라 안돼. 뭐 필요한 거 있음 사서 써. 나중에 택배로 부칠게."
"나 린에게 고백했어."


병원에 나가지 않은지 일주일 째다. 시간은 남아 돌았지만 마키는 문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린이 하나요 집에 있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고백을 받아준 것은 꽤 의외였다. 미국에서 들었던 린의 마음에서 좋아히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건 확신이었다. 근거없는 확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린이 하나요의 마음을 받아버린 이상 마키의 고백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고백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마키는 흐트러진 머리를 감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린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날 일도 사과하고 싶고.




코토리가 없는 회사는 예전과 같았다. 언제 어느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살얼음같은 침묵, 수없는 일거리. 매일같이 야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의 양이 고마운지 억울한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다들 퇴근한 사무실은 린의 자리만 빼놓고 캄캄했다. 이제는 이 모습의 사무실이 더 익숙했다. 오늘은 집에 좀 늦게 들어가고 싶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열었다. 마키의 전화번호 앞에 손가락이 멈춘다. 보고싶었다. 사과도 하고 싶었고- 라는 명목 하에 보고 싶었다. 아직은 감정이 껄끄러운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나요에게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요짱. 나 오늘 야근 때문에 늦어.]
[나도 잠시 아는 사람 만나서 늦을 거 같네..에헤헤.]
[알겠어:)]

안주에 맥주 한 캔 마시고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 들어가야지. 가방을 정리하는 린의 손이 분주해졌다. 안주로는 타코야끼가 좋을까, 편의점에서 파는 과자를 사먹는 게 나을까. 생각하며 회사 바깥으로 나왔다.

어.

빨간 머리의 여자는 꿈처럼 서 있었다. 꿈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꾸는 꿈 같은가보다. 린은 다시 안주 생각을 하며 여자아이와 반대의 길로 걸었다.

"나 보고도 모르는 척이야?"
"..."
"얘기 좀 해."

꿈이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마키는 린 앞에 서 있었다. 손을 잡아끌고 가는 마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런 채로 린은 마키를 따라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조용한 라멘집이었다. 늙은 주인장은 린과 마키가 들어오자 라멘을 만들기 위해 주름진 손을 뻗어 냄비를 불에 올려놓았다. 사케를 익숙하게 들고 온 마키는 린의 잔에, 또 그녀의 잔에 넘치지 않게 부었다. 그 행동이 끝날 때까지도 린은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할지, 어떻게 표정을 짓고 행동해야할지 아무것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우선, 그 날 화내서 미안해."

먼저 사과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먼저 마키가 사과할 줄은 몰랐다.

"네 얘기를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그래. 그건 마키짱이 잘못했어."
"알아. 그것때문에 내 집을 나갔다면 미안해. 다시..돌아올 수는 없어?"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짐을 싸서 다시 하나요에게서 마키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하나요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침묵하는 린을 보며 마키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요의 집에 들어갔다고 들었어."
"..누구에게 들었어?"
"하나요에게."
"..."
"고백도 받았다고 들었어."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마키는 숨을 들이쉬었다. 막 나온 라멘은 따뜻한 김을 품고 있었다. 늙은 주인장은 주방 한 구석에서 다시 졸고 있었고. 사케는 마키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말해도 될까.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린의 퉁명스런 얼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되새겼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를 챙겨주는 마음은 친구니까 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내 마음에 남는 건 너였어.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간에 먼저 생각나는 건 너였어. 미국에서 알았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을. 그 때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네. 한 발 늦기도 했고."
"...그래ㅅ.."
"좋아해."
"..."
"네가 회사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건 진즉에도 알고 있었어. 옆에서 네가 이겨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회사때문에 온 마음이 지쳐 있었으니까. 체코에서도 알고 있었어. 뚫어지게 보던 세시 삼십 분."
"..."
"열두 시. 스쿨 아이돌의 정점을 찍고 있던 우리는 뮤즈가 해체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지.
시계는 세시 십오 분을 가리켜. 너는 회사에 입사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일은 힘들었고, 너는 지치고. 울면서 나에게 전화도 했었어. 너는 버튼을 잘못 눌렀겠지만 힘들다고 네가 중얼거리는 걸 나는 들었어."
"..틀려."
"시계는 세시 삼십분을 가리키더라. 과로로 쓰러지고 사직서를 내야 할 정도로 너는 지쳐 있었겠지만- 린."

"삼십 일분이야."

시계는 올라가고 있어. 가게에 있는 검정색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단순한 모양의 시계였지만 삼십 일분이 선사하는 의미는 린에게는 사뭇 달랐다. 마키는 린의 손을 잡아왔다. 차가운 손을 감싸는 따뜻한 손에서는 긴장한 탓인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마키는 린과 눈을 마주해왔다.

"같이 널 일으켜주고 싶었어... 어쩔 수 없는 고백이지만.. 좋아해, 린."

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멘은 한 입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로 가방을 챙겨 나왔지만 마키는 붙잡지 않았다. 이 행동 또한 마키의 계산 아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분했다. 린의 뺨을 타고 눈물이 그렁그렁 타고 내려왔다. 분함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린은 하나요의 집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린!!"

마침 하나요가 보였다. 린은 뛰었다. 차가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눈물조차도 얼어버릴 것 같았다. 하나요의 앞까지 전속전력으로 달려 그녀를 꼭 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심장소리가 들리게끔 안는다.

"린.."

하나요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나요의 두 뺨은 차가운 린 손에 압박당했다. 린의 입술이 하나요에게 겹쳐왔다. 입술은 그대로 벌려져 혀 끝을 두드린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어간다. 린의 차갑고 짜운 느낌이 하나요에게 그대로 전해와 얽힌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
긴 8편이었습니다.
쓰다보니 에필로그는 무슨...
9편이 마지막이 되네요ㅠㅠ 분량조절 못하는 나는ㅠㅠ....
한편 남았습니다
조금 더 힘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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