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지금." "떨어졌다고." 니코는 그랬다. 백번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음 기회는 또 있다고, 그 시험은 어려운 시험이라서 너도 한 번에 붙는 건 어렵다고. 그녀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에서는 백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나 있는 거 같았다. 그녀는 아무 이야기도 하기 싫은 듯 방 안으로 들어갔고 니코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만들던 나베 요리가 있었다. 그녀에게 먹여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서둘러 파를 썰었다. "나와 봐." "..." "나와보라구" "싫어." 겨우 들릴까말까한 목소리에 나는 방문 앞에서 떨어졌다. 열쇠가 어딨더라... 2분 뒤 거실의 악세사리 상자 안에서 발견한 절그럭거리는 열쇠를 가지고 방문 앞에 다시 섰다. 나는 무서웠다. 문이 열리고 그녀..
"나는-" "네." "노조미를 좋아하는 거 같아."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건 비단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제가 더 죄인이지. 그냥 좋은 언니와 동생으로도 남을 수 있었는데. 이 상황을 만든건 제 자신이었다. "에리에겐..최선이었겠죠..." "우미야말로,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만... 노력해야죠." 같이 걷는 두 그림자가 길게 어그러졌다. 작은 자갈들이 밟히는 둔탁한 학생구두의 소음과 딱딱 부서지는 하이힐의 소리는 어긋나게 조화하고 있었다. "좋아했어요." 단단하지만 따뜻한 그 목소리에 에리는 설핏 걸음을 멈췄다. 두고두고 하고 싶었던 말이다. 이렇게 쓸쓸한 상태가 아니라 초콜릿처럼 달달한 분위기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기다리고 있는 간질간질한 상태로 고백하고 싶었다. 고개를..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아마 생각할 수 없는 당신의 표정 아래에는 내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면 좋겠어요.저는 당신을 참 좋아했어요. 당신이 처음 말을 걸어주었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 때부터.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어요.당신은 내가 끌려서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 순간 저는 마법에 걸린 듯 환상에 빠졌습니다. 에- 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던 건 진심이 아니였어요. 너무 놀라서, 너무 놀라서. 당신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저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비현실적이여서 조금 낮은 목소리를 내어버렸어요.그 짧은 순간이 날카로운 단도처럼 당신의 기억에 핏자국을 내 버린것만 같아 항상 죄책감에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기 겁났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올곧게 나만 봐 주었어요. ..
"맥주랑- 맥주랑.." 나는 무의식적으로 장바구니 안에 맥주만 집어넣고 있었다. 자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감출 길이 없었다. 한적한 마트 안에 카운터 직원이 자신을 향해 눈길을 자꾸 주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맥주 캔을 다섯 개쯤 들고 나니 손에 들리는 묵직함에 억지로 현실로 끌려왔다. 내 머릿속은 그 생각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과포화였다. 알파카 탈, 점 보던 그 장면, 너의 아름다운 모습과 눈빛부터 내가 너에게 소리질렀던 상황, 캄캄히 몰려오는 외로움. 그리고 5년 전 기억들까지. 순서없이 몰려드는 기억들은 죄스러웠고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미안...해." 얼핏 중얼거렸다. 네가 들을 리 만무하겠지만. 집까지 걸어가기도 힘이 없었다. 축 늘어진 비닐봉지에서 덜렁..
"아- 일하기 싫다." "맞아맞아. 오늘같은 날 그냥 집에서 맥주 한캔하고 TV나 보면 딱인데 그치." "차라리 학생이면 좋을텐데. 이렇게 일도 안하고." "그런가. 난 아예 유치원생이였으면 좋겠다니까~. 야자와 씨는 어때?" 네? 점심시간. 여러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피곤한 눈을 부릅뜨며 하얀 쌀밥과 야키니꾸를 우걱우걱 공략하고 있었는데. 평범하게 일하기 싫은 이야기에 왜 날 끌어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여자들의 오지랖은 넓다. 그러게요, 저도 학생으로 돌아고 싶어요. 대충 둘러대고 다시 젓가락질을 하려고 했지만 난데없이 귀에 꽂히는 기억-이 파편처럼 마음을 스친다. 내 기억은 현실을 춤추듯 떠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고 떠밀리듯 기억 속에 정착했다. 현실은 아무리 고개를 도리도리해도 나타나..
"방학이다~ 그치?" "그렇구만. 방학 때 닌 뭐 할낀데?" "으- 아직은 무계획. 토죠는?" "난, 러시아." 어리둥절한 옆의 여자에게 가벼운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러시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잊혀질래도 잊혀지지 않는 너. 너 때문에 나는 러시아가 굉장히 낯설지만 낯익은 곳이였다. "음- 러시아라면 금발의 예쁜 언니들이 많은 곳인가? 저 언니처럼." 같이 얘기하던 옆의 여자는 길게 손을 뻗었다. 시원시원한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 긴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한 까만 선글라스보다 그 아래 들어오는 붉고 작은 입술이였다. 도톰하고 붉은 입슬은 푸른 빛깔의 빨대를 앙- 하고 물고 있었다. 가슴이 약간 끼는 듯한 채도가 낮은 청록색의 블라우스. 그리고 하얀색 ..
이제는 가벼운 여름이불조차도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되어도 아직은 이불 안에서 앙탈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창문을 통해 아침부터 따갑게 내리는 햇살이 마냥 원망스럽다만은. 부스스, 약속이 없는데도 오늘따라 눈이 반짝, 하고 떠졌다. 무심히 본 핸드폰에는 니코의 문자가 와 있었다. [생일 축하해. 노조미.] 누가 츤데레 아니랄까봐. 열두시 딱 되는 시간에 보내놓고 지금은 곤히 자고 있겠지. 고맙다고 꼭 안아주고는 싶지만 징그러운 성격이라 큼큼,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부끄러운 감정들이 헛기침 속에 숨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오늘은 왠지 혼자 고기 정도는 조금 많이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 날. 나를 위해서 아메리카노의 씁쓸한 느끼며 턱을 괴고 오후의 햇살을 받고 싶은 날. 나..
"스피릿츄아루파와아-" "쾅쾅쾅!! 조용히 좀 해요!" 벽을 두어번 쿵쿵 두드리자 반대편에서 하...잇-하는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가 들린다. 하여튼 진짜.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집중이. 오늘 하루만 해도 수어 차례 이런 일이 있었다. 옆집의 스피릿츄얼 파워를 가진 여자에게 쫌 따져야겠다, 생각하며 현관문을 거칠게 열었다. "ㅇ...어...음...ㅇ...ㅏ!" "....누...누구..." 바이올렛 색깔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여자가 저를 올려다본다. 뭐 팔러 왔다기에는 긴 원피스 차림이라 집안에서 주로 입는 평상복 같았다. 게다가 뭐 팔러왔으면 옆에 물건이라도 끼고 있어야하는데 딸기 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ㅇ...옆집입니다...." 누구요? 옆집? 놀란 마음에 날카롭게 외치자 그녀가 죄송합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냈다. 줄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까만색 이어폰을 보자 드디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에 맞춰 비트도 같이 울린다. 퇴근이다. 나의 일은 항상 고됐다. 일이 끝나면 지나가는 사람한테 하소연하고 싶었고, 뭐 이리 세상에 불평불만이 많냐며 허공에 대고 소리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어폰을 통해 울리는 째지는 목소리에 위안받곤 했다. 어느 하나 고되지 않은 일은 없다. 옆을 지나가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도. 버스기사 아저씨도. 그리고 집에 가면 반겨주실 부모님도.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진 고민과 걱정들을 안고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도 받아가면서 고되게 하루 또 ..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답답한 게 응어리져서 내려가지 않을 때, 담배도 손쉽게 잡히지 않을 때. 오늘은 좀 그런 날이었다. 어제 낮부터 하루종일 쳐다 본 컴퓨터 화면에 질려 질펀히 자고 일어나니 눈은 몇 번을 꿈뻑꿈뻑 감았다 떠도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이불 밖을 벗어나고 싶어 허리는 꿈틀꿈틀 요동쳤으나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핸드폰을 보니 곧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일으켜지지도 않는 몸을 꾸덕하니 일으키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안은 조용했고 내 눈밑의 다크서클처럼 퀭했다. "..." 시계초침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계는 10시 42분 57초를 부근으로 멈춰 있었다. 나는 그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한창 예민하게 신경질이 나 있던 때, 아무 이유 없이 시계..